<단편 : 비밀정원 part 2>
-들어가며….
다행히 나의 첫 휴식기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때 나를 그 끔찍한 자학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어이없게도 한 편의 만화영화였다.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봤던, <피터 팬>. 그때 난 매일 한 줌의 빛도 용서하지 않은 방에 처박혀 유튜브만 주구장창 보다가, 새벽이 찾아오면 울다 지쳐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은 나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터 팬>을 추천해줬고 난 덕분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노트북을 덮으려다가, 자동재생 때문에 우연히 한 영상을 더 보게 되었는데, 그건 <피터 팬2>에 나오는 어른이 된 웬디와 피터 팬의 재회 장면이었다.
피터 팬은 자신과 달리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버린 웬디를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웬디?’
웬디가 웃으며 인사하자 피터는 웬디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리고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넌 변했구나.’
그러자 웬디는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냐, 피터. 난 변하지 않았어.’
웬디의 그 말에 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나의 첫 휴식기, 난 잊고 있던 내 안의 가장 중요한 무언갈 발견했다.
#1
창문을 통해 마주 본 나를 보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눈물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 꼴을 보려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던가. 잿빛으로 변한 나를 보고 있자니 내 안에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꼭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속은 텅 빈 것 같은데 숨이 막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더랬다. 그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무언가가 생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나를 비추던 통유리는 그 형태가 일그러지더니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만들어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곳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가 들어왔던 입구는 닫혀버렸다. 이제 선택지는 없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끝없는 어둠이었다.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까지 온 건지, 어디에서 온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도, 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두려움도 들지 않았다.
“흑흑흑….”
얼마나 걸었을까. 근처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 소녀가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얘, 괜찮니? 왜 이런 데에서 혼자 울고 있어.”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 깜짝 놀라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멀어졌다.
“이건…, 나잖아.”
울고 있던 아이의 정체는 나였다. 그것도 14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뒤로 물러서는 나의 팔을 붙잡고는 연민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세요.”
“...”
“이젠 저를 똑바로 보세요. 그만 나를 용서하시고,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이거 놔.”
분명 나보다 체구도 작고, 힘도 없는 연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난 왠지 그 아이를 똑바로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당신의 시간은 여기 멈춰있어요. 모습은 변했을지 몰라도, 당신의 안에는 아직 나의 모습이 상처로 남아있죠. 그래서 난 지금까지 시간 속에 사라지지 못하고, 춥고 어두운 여기에 홀로 남아 당신에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난 아이를 있는 힘껏 밀치며 말했다. 어린아이는 힘없이 내게서 밀려나 넘어지고 말았다. 난 아이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지마. 넌 내게 상처가 아니라 치부야. 아픈 과거가 아니라 숨기고 싶은 과거라고.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너야. 그러니까 계속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내 인생에 발목 잡지 말고 이제 제발 사라져.”
“나를 붙들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
“뭐?”
“나를 붙들고 매일 밤마다, 그러지 말 걸, 그러면 안 됐었는데 끝도 없이 자학하잖아요. 하지만 결국 괴로운 건 당신이에요.”
아이는 일어나 내게 다가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차게 식은 내 손과 달리 아이의 손은 참 따뜻했다.
“이젠 저를 놓아주세요. 당신은 이제 저와 달라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참 단단해졌어요. 그러니, 이젠 나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겁내며 살지 말아요.”
난 그제야 아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내 눈에, 나의 날카롭고 잔인한 잣대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받은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난 아이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넌 그냥 많이 어렸을 뿐인데, 많이 서툴고 무서웠을 뿐인데 누구보다 너를 미워해서 미안해.”
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난 이제 네가 아프지 않아. 넌 그냥, 많이 서툴렀던 나였을 뿐이야.”
아이는 내게 환히 웃음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나의 미소를 마주한 그 순간, 아이는 하얀빛이 되어 흩어졌다.
#2
그렇게 어린 날의 나를 보내고 한동안 계속 끝없는 어둠이 다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내 인기척이 느껴지자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축 처진 날개를 가지고 있는 작고 기운 없어 보이는 요정이었다. 요정은 나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꿈속에서나 들을 법한 달콤하고 포근한 목소리였다. 말투는 전혀 그러지 않았지만.
“야, 왜 이제 와! 하도 안 와서 날 다 잊어버린 줄 알았잖아.”
요정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몇 번 날지 못하고 떨어졌다. 난 깜짝 놀라 요정을 손으로 받아 주었다. 가까이서 본 요정은 훨씬 더 작고, 여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리고 작은 생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린 기분이었다. 난 요정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넌 누구니?”
나의 말에 요정이 내뿜던 희미한 빛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크기도 훨씬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전에 당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다.
“역시 잊은 거였구나.”
“잊어?”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굴 수가 있어. 날 만든 건 너잖아.”
“내가 만들었다고?”
“그래, 어린 네가 만든 꿈속 친구. 나랑 같이 네가 좋아하는 높은 밤하늘도 날아다니고, 예쁜 인어를 만나러 가기도 했지.”
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요정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 모든 걸 다 지워버렸구나. 하긴 그러니까 이 정원이 이 지경이 된 거겠지.”
“정원?”
“그래, 정원.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발견할 수 없는 곳. 정원의 주인은 어른이 되기 전까지 늘 꿈속에서 이 정원에 초대돼. 여기서 나 같은 친구를 만들고, 향기를 만들고, 색을 입히지.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이고, 햇살을 내려.”
“하지만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어른이 되었다는 거야. 원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이곳에 오는 날들이 줄어들어. 그러다 영영 잊어버리게 되고, 다신 올 수 없게 되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왜?”
“중요한 것들이 많아져서? 사람은 자랄수록 책임져야 할 사람들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게 되거든. 그런 것들에 신경 쓰다 보면,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의 본질도,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본질도 잊어버리게 되지. 그렇게 되면 이곳은 이렇게 영원히 끝없는 어둠이 자리 잡게 돼.”
“...”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빛을 잃는 거야. 그렇게 회색인간이 되는 거지.”
요정의 그 말에 난 유리에 비친 회색 인간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낀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의 이유를 알았다. 그래, 내가 열심히 달려온 이유는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멈춰버렸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난 어디에 있든, 유일한 하나이며 나만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나만의 정원, 나만의 세상이 있으니까. 나의 이 작은 세상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이제 알겠어. 여긴 내 마음속이구나.”
나의 말에 한 줄기 빛도, 어떤 바람도 없이 멈춰버린 듯한 이곳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풀 죽어 앉아있던 요정도 갑자기 몸에서 빛을 내뿜으며 축 처져 있던 날개를 펼쳤다. 요정은 내게 환히 웃으며 날아올랐다. 요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지고, 목소리도 한층 더 온화해졌다.
“그래, 맞아. 스스로 기억해 냈구나. 사람들은 누구나 환상 정원에 가고 싶어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내 안에 있는 비밀 정원을 발견하는 거란다. 환상 정원에 간다하더라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회색인간이 되고 말아.”
“이곳에 다시 빛이 일까?”
“그럼, 네가 이곳을 찾았고 또 그 안에서 나를 찾아냈잖아. 이제 이곳의 너만의 향기로 꽃이 피고, 너만의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일 거야.”
문이 열렸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잊지마, 난 너야.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난 존재하지 않아. 난 네가 순수하고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고, 네가 꿈꾸던 모든 순간을 이어준 빛이야. 절대 잊지 마. 난 언제나 네 안에 있어.”
“응, 잊지 않을게.”
난 요정에게 작별인사를 건내고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까 내가 서 있던 그곳이었다. 여전히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우중충했고, 빽빽이 늘어서 있는 높은 건물들도, 내가 서 있는 이곳도 모두 회색빛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유리에 비친 난 더 이상 회색인간이 아니었다. 난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만의 색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