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기초 단계인 드로잉은 가장 순수하며 자유로운 순간이다. 나의 드로잉은 환상을 나타내지만 환상적이거나 이상향적 형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을 시작한 어릴 적부터 다룬 종이는 가장 친근하면서 자유로운 공간이다. 이러한 종이 위에 그려진 유아적이고 직관적인 어린 아이의 드로잉 혹은 이미지 자체가 환상과 욕망이 일치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경험이다.
종이가 자유와 환상이라면 캔버스는 현실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종이가 ‘어린 나’라면 캔버스는 ‘어른의 나’이다. 종이가 환상과의 만남이라면 캔버스는 환상의 객관화이다.
나에게 종이는 순수와 대면할 수 있는 매개체이며 원초적인 환상의 공간이다. 종이의 ‘구겨짐’은 환상의 가벼움을 말함과 동시에 현실의 자아를 설명하기 위한 액션의 결과이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환상은 종이 위의 그림일 뿐임을 일깨우는 객관화의 과정이다. 이같이 '구겨짐'은 더 이상 환상의 세계에 의지하지 않고 불확실한 세계(현실)로 나아가려는 자아이다.이러한 자아는 불안하지만 현실을 인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