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장서연 Jang-Seoyeon 


어느 날 한 번은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더랬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유없이 눈물이 나더랬다. 

혼자 있는 방에서도 소리를 낼 수 없어 한참동안 입을 틀어 막고 끅끅거리며 울어댔다. 

돌아보니 내 지난 날에는 내가 없는 것만 같았다. 내겐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6년만에 다시 펜을 들었다. 

텅 빈 하얀 공간을 보고 있자니, 꼭 속이 텅 빈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공간을 나의 말로 채워 넣으니, 내 시간에 다시 색이 입혀지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는 나조차도 찾기 어려운 작은 세계가 있다." 

난 나의 한 줄에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나의 글은 그런 글이면 충분하다.

내 눈물 묻은 한 마디에 누군가가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안도할 수 있다면, 내 푸념 섞인 말들에 누군가 피식하고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한 번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면 나느 계속해서 하얀 여백을 나의 말들로 채워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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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 회색인간 part 1>


-시작하며…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 수능이 끝나고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한 줄짜리 성적표를 쳐다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하필 부모님의 반대가 있어서 오랫동안 방황했던 시간들이 아까워서도 아니었고, 하필 이번 수능 국어가 너무 어려워 부서진 멘탈 때문에 틀릴 이유가 없는 문제들도 틀려버린 순간이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고작 한 줄짜리 성적표에는 내가 없었다. 내 짧디짧은, 그러나 나름대로 복잡하고도 어려운 서사들로 꽉꽉 채워진 나의 날들이 그곳엔 없었다. 앞으로 마주할 사회에 나의 그런 서사들은 변명일 뿐이고, 사회는 나를 이 한 줄로 평가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왜 그 긴 길을 걷는 내내 멈춰 서고 넘어졌는지, 왜 자꾸 지름길을 찾기는커녕 뱅뱅 돌아가다가 고작 여기서 멈춰버린 건지 나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탓할 것이 나뿐이었다. 나의 첫 휴식기는, 그렇게 끊임없는 자책으로 나를 갉아먹으며 시작되었다.


#1

댕, 종이 울렸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어디지? 주위에는 똑같이 생긴 회색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드문드문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몇몇 사람이 보였다. 온통 잿빛인 세상이었다. 바람도, 햇빛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꼭 멈춘 시간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난 내 옆에 덜덜 떨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긴 어디죠?”

“난 망했어. 이제 큰일 났다고. 종이 벌써 쳐버렸어.”

“이봐요, 괜찮아요?”

“난 틀렸어. 난 끝났어. 난 아마 평생을 밑바닥에서 기게 될 거야.”

 

남자에게 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손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정상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남자에게서 멀어져 난 그 앞에 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여자는 뚱한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난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종소리가 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어요. 여긴 어디죠?”

“여긴 그저 그런 사람들이 지내는 곳이지.”

“그저 그런 사람들이요?”

“그래. 유난히 모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 어디에나 쓸 수 있지만, 그 어디서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여자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꼭 모든 감정을 빼앗긴 사람처럼.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야.”

“언제까지요?”

“아마 죽을 때까지?”

 

쿵. 내 안에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정신이 온전히 든 기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뼈저리게 와닿았다. 내가 오려던 곳은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전의 그 남자처럼.

 

“뭔가 잘못됐어요. 제가 가려던 곳은 이곳이 아니에요.”

“혹시 환상 정원으로 가려고 했었나? 눈부시게 반짝이고, 행복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그곳에.”

“맞아요, 혹시 아시나요?”

“늦었어.”

“네?”

“그곳에 가고 싶음 남들보다 일찍 출발하던가, 더 빨리 달렸어야지. 여기서 한참을 더 가야 있는 곳인걸.”

“하지만, 전 정말 열심히 여기까지 온 건데요. 전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종이 쳐버렸잖아. 이미 다 끝났어. 너도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야.”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가장 흔해서 쓸모없는 ‘회색 인간’


#2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 한참을 달렸다. 사실, 도망갔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땠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고작 여기까지라니. 무서웠다. 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뤄낸 길이 고작 이 정도로라면 앞으로 내가 아등바등 걸어갈 길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얼마나 미미하고 하찮은 것일지 두려웠다. 남들의 그 시선은 곧 사실이 되고, 난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는데도 여전히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회색 고층 건물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숨을 헉헉거리며 앞을 내다봤을 땐, 통유리로 이루어진 건물 창문에 잔뜩 헝클어진 채로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았다. 거울 속에 나는 그 어떤 색도 없었다. 탁한 잿빛을 띠고 있을 뿐.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삭막한 이곳처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는 순간, 난 내가 스스로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잔뜩 겁에 질린 거울 속에 내가 불쌍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내가 지금 가장 슬픈 건,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나를 하찮게 여기는 남들의 시선 속에 나의 시선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버렸다. 내가 나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어쩌다 내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나. 내 존재를 내 안에서 지움으로써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필요할 때 쓰고 버릴 수 있는 휴지 조각 같은, 언제든 다른 대용품으로 교체 가능한 기계 부품 같은 사람. 매일 메케한 매연 냄새를 맡으며,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거리를 지나, 회색 건물 안으로 들어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그 안에서 나오는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차게 식은 맨밥을 억지로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것처럼,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 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세에 나의 색을 죄다 뺏겨, 내가 그렇게 끔찍해 하던 회색 인간이 되어버렸다.




<단편 : 비밀정원 part 2>


-들어가며….

다행히 나의 첫 휴식기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때 나를 그 끔찍한 자학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어이없게도 한 편의 만화영화였다.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봤던, <피터 팬>. 그때 난 매일 한 줌의 빛도 용서하지 않은 방에 처박혀 유튜브만 주구장창 보다가, 새벽이 찾아오면 울다 지쳐 잠드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은 나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터 팬>을 추천해줬고 난 덕분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노트북을 덮으려다가, 자동재생 때문에 우연히 한 영상을 더 보게 되었는데, 그건 <피터 팬2>에 나오는 어른이 된 웬디와 피터 팬의 재회 장면이었다.

 

피터 팬은 자신과 달리 훌쩍 자라 어른이 되어버린 웬디를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웬디?’

 

웬디가 웃으며 인사하자 피터는 웬디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리고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넌 변했구나.’

 

그러자 웬디는 미소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냐, 피터. 난 변하지 않았어.’

 

웬디의 그 말에 난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나의 첫 휴식기, 난 잊고 있던 내 안의 가장 중요한 무언갈 발견했다.


#1

창문을 통해 마주 본 나를 보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눈물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 꼴을 보려고,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던가. 잿빛으로 변한 나를 보고 있자니 내 안에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꼭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속은 텅 빈 것 같은데 숨이 막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더랬다. 그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갑자기 무언가가 생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나를 비추던 통유리는 그 형태가 일그러지더니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통로를 만들어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곳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가 들어왔던 입구는 닫혀버렸다. 이제 선택지는 없다.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 수밖에.

 

끝없는 어둠이었다.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디까지 온 건지, 어디에서 온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도, 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란 두려움도 들지 않았다.

 

“흑흑흑….”

 

얼마나 걸었을까. 근처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한 소녀가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얘, 괜찮니? 왜 이런 데에서 혼자 울고 있어.”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 깜짝 놀라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멀어졌다.

 

“이건…, 나잖아.”

 

울고 있던 아이의 정체는 나였다. 그것도 14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뒤로 물러서는 나의 팔을 붙잡고는 연민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세요.”

“...”

“이젠 저를 똑바로 보세요. 그만 나를 용서하시고,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이거 놔.”

 

분명 나보다 체구도 작고, 힘도 없는 연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난 왠지 그 아이를 똑바로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당신의 시간은 여기 멈춰있어요. 모습은 변했을지 몰라도, 당신의 안에는 아직 나의 모습이 상처로 남아있죠. 그래서 난 지금까지 시간 속에 사라지지 못하고, 춥고 어두운 여기에 홀로 남아 당신에게 평생 용서받지 못할 거란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난 아이를 있는 힘껏 밀치며 말했다. 어린아이는 힘없이 내게서 밀려나 넘어지고 말았다. 난 아이에게 등을 돌린 채,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지마. 넌 내게 상처가 아니라 치부야. 아픈 과거가 아니라 숨기고 싶은 과거라고.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너야. 그러니까 계속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내 인생에 발목 잡지 말고 이제 제발 사라져.”

“나를 붙들고 있는 건 당신이에요.”

“뭐?”

“나를 붙들고 매일 밤마다, 그러지 말 걸, 그러면 안 됐었는데 끝도 없이 자학하잖아요. 하지만 결국 괴로운 건 당신이에요.”

 

아이는 일어나 내게 다가와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차게 식은 내 손과 달리 아이의 손은 참 따뜻했다.

 

“이젠 저를 놓아주세요. 당신은 이제 저와 달라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참 단단해졌어요. 그러니, 이젠 나의 기억으로 괴로워하고 겁내며 살지 말아요.”

 

난 그제야 아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제야 내 눈에, 나의 날카롭고 잔인한 잣대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받은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난 아이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넌 그냥 많이 어렸을 뿐인데, 많이 서툴고 무서웠을 뿐인데 누구보다 너를 미워해서 미안해.”

 

난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난 이제 네가 아프지 않아. 넌 그냥, 많이 서툴렀던 나였을 뿐이야.”

 

아이는 내게 환히 웃음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나의 미소를 마주한 그 순간, 아이는 하얀빛이 되어 흩어졌다.


#2

그렇게 어린 날의 나를 보내고 한동안 계속 끝없는 어둠이 다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내 인기척이 느껴지자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축 처진 날개를 가지고 있는 작고 기운 없어 보이는 요정이었다. 요정은 나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꿈속에서나 들을 법한 달콤하고 포근한 목소리였다. 말투는 전혀 그러지 않았지만.

 

“야, 왜 이제 와! 하도 안 와서 날 다 잊어버린 줄 알았잖아.”

 

요정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몇 번 날지 못하고 떨어졌다. 난 깜짝 놀라 요정을 손으로 받아 주었다. 가까이서 본 요정은 훨씬 더 작고, 여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여리고 작은 생명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린 기분이었다. 난 요정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넌 누구니?”

 

나의 말에 요정이 내뿜던 희미한 빛은 이전보다 훨씬 약해졌다. 크기도 훨씬 더 작아진 느낌이었다. 전에 당차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을 보였다.

 

“역시 잊은 거였구나.”

“잊어?”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처음 보는 것처럼 굴 수가 있어. 날 만든 건 너잖아.”

“내가 만들었다고?”

“그래, 어린 네가 만든 꿈속 친구. 나랑 같이 네가 좋아하는 높은 밤하늘도 날아다니고, 예쁜 인어를 만나러 가기도 했지.”

 

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요정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 모든 걸 다 지워버렸구나. 하긴 그러니까 이 정원이 이 지경이 된 거겠지.”

“정원?”

“그래, 정원.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발견할 수 없는 곳. 정원의 주인은 어른이 되기 전까지 늘 꿈속에서 이 정원에 초대돼. 여기서 나 같은 친구를 만들고, 향기를 만들고, 색을 입히지.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이고, 햇살을 내려.”

“하지만 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어른이 되었다는 거야. 원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이곳에 오는 날들이 줄어들어. 그러다 영영 잊어버리게 되고, 다신 올 수 없게 되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왜?”

“중요한 것들이 많아져서? 사람은 자랄수록 책임져야 할 사람들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게 되거든. 그런 것들에 신경 쓰다 보면,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의 본질도,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본질도 잊어버리게 되지. 그렇게 되면 이곳은 이렇게 영원히 끝없는 어둠이 자리 잡게 돼.”

“...”

“그때가 되면 사람들이 빛을 잃는 거야. 그렇게 회색인간이 되는 거지.”

 

요정의 그 말에 난 유리에 비친 회색 인간이 되어버린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느낀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의 이유를 알았다. 그래, 내가 열심히 달려온 이유는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게.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여기서 멈춰버렸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난 어디에 있든, 유일한 하나이며 나만이 만들어 갈 수 있는 나만의 정원, 나만의 세상이 있으니까. 나의 이 작은 세상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이제 알겠어. 여긴 내 마음속이구나.”

 

나의 말에 한 줄기 빛도, 어떤 바람도 없이 멈춰버린 듯한 이곳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풀 죽어 앉아있던 요정도 갑자기 몸에서 빛을 내뿜으며 축 처져 있던 날개를 펼쳤다. 요정은 내게 환히 웃으며 날아올랐다. 요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지고, 목소리도 한층 더 온화해졌다.

 

“그래, 맞아. 스스로 기억해 냈구나. 사람들은 누구나 환상 정원에 가고 싶어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내 안에 있는 비밀 정원을 발견하는 거란다. 환상 정원에 간다하더라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회색인간이 되고 말아.”

“이곳에 다시 빛이 일까?”

“그럼, 네가 이곳을 찾았고 또 그 안에서 나를 찾아냈잖아. 이제 이곳의 너만의 향기로 꽃이 피고, 너만의 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일 거야.”

 

문이 열렸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잊지마, 난 너야. 네가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난 존재하지 않아. 난 네가 순수하고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기억이고, 네가 꿈꾸던 모든 순간을 이어준 빛이야. 절대 잊지 마. 난 언제나 네 안에 있어.”

“응, 잊지 않을게.”

 

난 요정에게 작별인사를 건내고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까 내가 서 있던 그곳이었다. 여전히 하늘은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우중충했고, 빽빽이 늘어서 있는 높은 건물들도, 내가 서 있는 이곳도 모두 회색빛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유리에 비친 난 더 이상 회색인간이 아니었다. 난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만의 색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짧은 말 : 다시 세상으로>


안녕, 피터 팬.

안녕, 나의 아이야.

어릴 땐 네가 참 야속했어.

매일 밤 엄마 몰래 창문을 열어놓고 자는데도 넌 한 번을 안 와주더라.

나도 너와 함께 하늘을 날며, 노래를 부르며,

인어들을 만나고, 후크선장의 배를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을 해.

네가 내게 오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잊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너와 보낸 시간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순간이자, 아득한 별빛 같았을 테니.

그렇게 너와의 시간들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된 거겠지.

그래서 넌 나에게 한여름 밤의 꿈으로조차 찾아와 줄 수 없었겠지.

그래, 맞아. 난 그렇게 내가 끔찍해 하던 회색 인간이 되어버렸던 거야.

 

피터, 난 더 이상 네가 오길 기다리며 창문을 열어놓는 어린 아이가 아니야.

그러기엔 난 너무 자라버렸어.

하지만 나, 언제나 너를 마음 한켠에서 추억하고 있어.

그리고 이따금 너를 꺼내 보지.

너를 떠올리면, 나의 구멍 난 마음엔 네가 가득 피어나.

내 마음에 네가 가득 만개할수록 난 때론 슬퍼지고, 때론 허무해져.

이제는 너만을 꿈꾸며 순수하게 반짝이던 나를 만날 수 없어서일까?

 

하지만 피터, 난 이제 알아. 내가 변한 게 아니라는 걸.

난 내가 발견한 작은 틈에서 너를 읽었고, 너를 느꼈고,

결국, 너를 찾아냈잖아.

난 네 덕에 여전히 꿈을 꾸고 반짝이고 있어.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영원이 없는 나에게도 영원이란 건 있을 수 없지만,

널 향한 나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 없어.

그래서 난 감히 널,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더 이상 널 꿈꾸지 않는 날, 슬퍼하지 않으려 해.

난 네 덕분에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이뤄낼 테니 말야.

 

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널 추억할 테니,

넌 멈춰진 시간 속에서 너의 시간을 머무는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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